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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상

전라좌수사에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1593년 7월,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겼다. 일본군들은 한산도해전에서 패한 후 거제도롤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순신 입장에서는 한산도에서 견내량만 틀어쥐고 있으면 바다에서만큼은 일본군의 서진을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전진기지인 부산포를 다시 공격하기도 수월한 장소였기에 한산도는 천혜의 요지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자리 잡자 일본군은 견내량과 거제도 안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못하였다. 나였다면 지금까지의 전쟁을 통해 피로하니 조금은 안도하며 휴식을 가질 법도 한데, 이순신은 달랐다. 한산도에서 무관 정사준과 함께 일본군의 주력 무기인 조총을 연구했다. 적군의 주력 무기가 지닌 장점을 파악하려 노력했고, 연구 끝에 조총에 뒤지지 않은 조선의 정철총통을 만들어냈다. 조정에.. 더보기
임진왜란의 휴전 명나라 입장에서는 조선을 돕기 위한 전쟁에 열심을 낼 필요가 없었다. 자국의 영토가 전쟁터로 되는 것을 막고자 병력을 파병한 이유도 있었다.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명나라 전사자가 1000명이 넘었다. 또, 벽제관전투에서는 당시 요동 제독이었던 이여송의 친위 기병 1500명이 몰살당하기도 했다.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해 자국 군대의 손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원정에 큰 어려움을 겪었던 명나라는 이 전쟁에 발을 빼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일본은 조선 침략을 결정하고 부산에 상륙하여 쉽게 한양을 점령하였다. 이후 고니시가 평양을 점령하고 가토가 함경도로 진격하던 때만 해도 만사가 형통한 듯 보였다. 그러나 이순신 때문에 수군의 서해 진출이 불가능해졌고, 보급 또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 더보기
웅포해전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1차 출정 옥포와 합포, 적진포에서 승리하였고, 2차 출정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에서 연전연승했다. 3차 출정의 한반도에서 승리하면서 남해의 재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안골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4차 출정에는 당시 적의 본진인 부산포까지 완전히 쓸어버렸다. 육지에서는 일본군이 압승했지만, 해전에서는 조선군이 압승을 하는 상황이었다. 부산포해전에서 대패한 이후 일본은 다시 한번 육지를 통해 호남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군은 호남으로 넘어갈 수 있는 관문이었던 진주성을 공격했으나, 성주 김시민과 진주성 주민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진주성은 지켜졌고, 일본군은 육지로의 호남 진출을 다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김시민은 전사하였지만 거의 위명은 일본에.. 더보기
부산포해전 부산 쪽에 첩보선을 보내 정탐하였는데, 일본 전함 470여 척이 부산 해안에 넓게 포진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자신들의 함대를 보호하기 위해, 부산포 해안 인근의 발석차는 물론 천자총통과 지자총통, 현자총통 같은 조선의 화포까지 무수히 배치하고 있었다. 실제로 부산포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본진, 나고야 사령부와 긴밀히 연락을 취하던 심장부였다. 일본군 입장에서 부산포가 무너진다면 육지의 일본군들이 본국인 일본으로 돌아갈 기착지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부산포를 반드시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대표할 만한 사령관들이 부산포에 다 모였고, 일본군에게 부산포를 공격당하는 것은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음을 의미했다. 거북선이 부산포를.. 더보기
공세종말점 공세종말점 : 작전한계점을 공격작전에만 한정할 경우 공세종말점(攻勢終末點, ~ of attack, breakpoint)이라고도 한다. 기본적으로 부대 전투력은 작전 수행에 따라 감소하지만 공격자(이하 공자)는 다른 작전에 비해 작전한계점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다. 일본군은 이순신에게 패한 이후 단 1척의 함선도 가덕도와 거제도 사이에 보이지 않는 해안 경계선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전라좌수영으로 돌아온 이순신은 여러 차례 승리를 통해 남해의 재해권을 완전히 장악했지만, 그럼에도 고민이 많았다. 일본군이 내륙을 통해 전라좌수영을 공격해 온다면 수군 병력만으로는 다소 한계가 있을 것이고, 일본군들은 최고의 곡창 지대인 전라도를 그냥 둘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전라도 공격 수장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였다. 일.. 더보기
안골포해전 이순신은 일본군이 안골포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로 가서 왜군을 섬멸하고 싶었지만, 격군들의 수고스러움을 알기에 칠천도에서 하루의 휴식을 더 주었다. 다음날 새벽 2시 칠천도에서 출격하였고, 이른 아침 안골포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일본군이 숨어 있는 안골포는 굉장히 좁고 얕은 포구였다. 썰물 때는 바닷물이 다 빠지고 갯벌이 드러나는 곳이다. 공격을 할 수 있는 시간 또한 정해져 있었다. 육지에는 왜군의 화포를 장착해 자신들의 함대를 엄호하고 있었다. 섣불리 공격하기에 위험 부담이 있었고, 밀물 시간을 놓치기 또한 아쉬웠다. 좁은 안골포에서 효과적으로 포를 쏠 계획을 했던 이순신은 2척씩 들어가 포를 쏘고, 교대하여 포를 식히고 재장전을 하는 등 준비 시간을 가졌다. 지상의 왜군의 포보다 조선.. 더보기
한산도대첩 조선 수군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국의 수군이 방심해서 졌을 것이라 생각했다. 바다와 해적의 나라라고 자부하는 자국의 수군이 먼바다로 끌고 나오지 못하는 조선 수군에게 실력에서 졌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수륙병진작전 실시, 남해안 쪽에 왜성을 쌓기, 조선 수군 섬멸 등 여러 명령을 했었지만, 전부 실패하였다. 조선의 왕을 잡지도 못했고, 사천과 당포에서 패하며 왜성 축조에도 차질이 생겼다. 7전 7패의 상황이 되었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사령관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시 일본 최고의 수군 권위자 구키 요시타카를 불렀고, 이순신 함대의 2배 병력을 주면 이기고 오겠다고 하였다. 뒤집어 얘기하면, 같은 병력으로는 이길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 더보기
율포해전 당항포해전 이틀 후인 6월 7일. 거제도 영등포에서 약탈을 하고 있는 일본 함대를 발견한 척후선은 신기전을 쏘아 올렸다. 동풍이 심하게 불어와 추격이 힘들었지만, 역풍을 뚫고 일본의 함대를 추격했다. 반면 일본 함대는 조선 함대를 보자마자 가덕도 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급했는지 배 안의 짐짝까지 버려가며 배의 속도를 높이려 했다. 그러나 동풍이 너무 강하자 일본군 함대 7척은 방향을 남쪽으로 꺾어 율포 쪽으로 향했다. 율포에 도착하자 일본군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갔다. 조선 수군은 일본의 전함 7척을 불사 지르고, 적의 수급을 베었다. 상당히 많은 일본군이 조선 수군의 화살에 맞아 쓰러져나갔다. 율포에서의 승리 후 조선 수군이 강하다는 소문이 퍼진 것인지 일본의 전투선은 단 한 척도 보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