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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상

공세종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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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세종말점 : 작전한계점을 공격작전에만 한정할 경우 공세종말점(攻勢終末點, ~ of attack, breakpoint)이라고도 한다. 기본적으로 부대 전투력은 작전 수행에 따라 감소하지만 공격자(이하 공자)는 다른 작전에 비해 작전한계점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다. 

일본군은 이순신에게 패한 이후 단 1척의 함선도 가덕도와 거제도 사이에 보이지 않는 해안 경계선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전라좌수영으로 돌아온 이순신은 여러 차례 승리를 통해 남해의 재해권을 완전히 장악했지만, 그럼에도 고민이 많았다. 일본군이 내륙을 통해 전라좌수영을 공격해 온다면 수군 병력만으로는 다소 한계가 있을 것이고, 일본군들은 최고의 곡창 지대인 전라도를 그냥 둘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전라도 공격 수장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였다. 일본 전국시대에 위명을 떨친 인물로 다른 다이묘들보다 나이와 경험, 지명도 등에서 월등했던 인물이었다. 무서운 기세로 전주를 향해 진격하던 고바야카와를 이치고개에서 전라도 순찰사 권율과 동복 현감 황진이 맞섰다. 이때 황진의 활약은 대단했다. 경상우도 쪽에서는 의병장들이 활약했다. 김면과 곽재우가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경상우도의 주도권을 상당히 찾아왔다. 그로 인해 경상도를 통한 전라도로의 진출로도 막혀 있는 상태였다. 전쟁의 양상도 바뀌고 있었다. 해전에서 전패를 당한 일본군은 서해로의 보급이 불가능해졌고, 육지에서도 호남 공격에 실패하였다. 보급품 부족으로 굶주림에 시달렸고, 조선의 추위와도 싸워야 했다. 이때의 일본군들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희망도 안보인 채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며, 매일을 악몽과도 같은 하루를 견뎌야 했을 것이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일본군 전진 기지이자 본영이라 할 수 있는 부산포를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은 부산포 공격을 위한 대대적인 출정을 준비했다. 더 많은 판옥선이 만들어졌고 충분한 포와 화약, 각종 무기들이 준비되었다. 연승 덕분에 조선 수군의 사기도 드높았으며, 여기저기 숨어있던 패잔병과 피난민들도 모여들면서 병력 자체도 증강되었다. 전라우수영의 이억기에게 미리 연락을 취해 여수로 불러 연합 훈련을 가동했고, 20여일 이상의 실전과 같은 합동 훈련을 통해 최강의 수군이 되었다. 4차 출정을 준비했다.

한산도 패전 소식을 들은 직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에게 두 가지 명령을 내렸다. 조선의 수군과 교전을 금하라. 조선 수군을 만나면 무조건 도망가라. 교전을 피해 도망가는 것은 일본군의 자유지만 이들을 사냥하는 것 역시 조선 수군의 자유였다. 낙동강 하구 쪽의 장림포에서 도망가는 6척의 적선에 함포를 쏘아 격침시켰다. 또 화준구미라는 곳에서 왜선 5척을 수장시켰다. 다음으로 다대포에서도 도망가는 8척의 적선을 격침시켰다. 임진왜란 발발했을 당시 윤흥신이 용감히 맞섰음에도 빼앗겼던 다대포를 결국 이순신이 회복해 낸 것이었다. 서평도에서도 9척의 일본 함선을 불태우거나 수장시켰고, 상당수의 일본군이 죽었다. 크고 작은 해전들에서 차례차례 적을 격파한 조선의 연합 함대가 마침내 절영도에 도착하였고, 2척의 왜선을 박살 냈다. 총 다섯 차례의 해전을 통틀어 30여 척 정도의 왜선을 침몰시켰다. 이순신의 연합 함대의 연속 승리를 통해 전쟁의 양상을 바꿔놨고, 우리의 바다를 지킴으로써 더욱 큰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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