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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상

임진왜란의 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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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입장에서는 조선을 돕기 위한 전쟁에 열심을 낼 필요가 없었다. 자국의 영토가 전쟁터로 되는 것을 막고자 병력을 파병한 이유도 있었다.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명나라 전사자가 1000명이 넘었다. 또, 벽제관전투에서는 당시 요동 제독이었던 이여송의 친위 기병 1500명이 몰살당하기도 했다.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해 자국 군대의 손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원정에 큰 어려움을 겪었던 명나라는 이 전쟁에 발을 빼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일본은 조선 침략을 결정하고 부산에 상륙하여 쉽게 한양을 점령하였다. 이후 고니시가 평양을 점령하고 가토가 함경도로 진격하던 때만 해도 만사가 형통한 듯 보였다. 그러나 이순신 때문에 수군의 서해 진출이 불가능해졌고, 보급 또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들고일어나는 의병이라는 복병에 일본군들은 당황했다. 농민들이 칼을 들고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일본군들은 조선 민병대의 이해할 수 없는 애국심과 충절에 사기가 많이 저하되었다.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떨쳐 일어나는 민족성을 일본군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본군들 또한 부상당했고, 병들고, 굶주렸다. 조선 수군에게 패했고, 명군까지 참전하자 사기는 저하되었다. 조선의 혹독한 추위로 동상에 걸려 손발이 성한 이들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일본군도 명나라도 피해가 심했지만, 가장 심한 건 조선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전 국토 70% 이상의 농경지가 황폐화되었다. 조선은 휴전을 찬성하지 않았지만, 명나라와 일본은 휴전에 대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휴전을 반대하는 조선을 배제한 채 명나라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사이에 휴전 논의가 계속되었다. 명나라는 일본에게 한양에서 퇴각하는 일본군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고, 조선은 일본에게 빼앗겼던 한양을 전쟁 발발 후 1년 만에 되찾았다. 

진주성 침략이 있었고, 9일 만에 점령했지만 전쟁 동력을 크게 상실했다. 진주성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3만 이상의 일본군 피해가 있었다. 진주성을 점령하고도 호남을 공격하지 못했고, 2차 진주성전투에서 황진을 비롯한 진주성 주민들의 처절한 저항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할 때까지 4년간 휴전이 유지될 수 있었다. 

상황이 6.25 전쟁과도 비슷한 느낌이 들은 것은 기분 탓일까? 국력이 약하고 침략을 당하면 당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국력을 키우고, 힘을 키워야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음을 절실히 깨닫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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