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상 썸네일형 리스트형 명량대첩 이순신이 해남 어란진에서 진도 벽파진으로 이동하자 일본의 수군은 비어있는 어란진까지 진격하였고, 어란진은 일본 수군의 새로운 전진 기지가 되었다. 이순신은 울돌목의 지형과 물살을 조사하는 것을 원천 봉쇄하고자 벽파진에 진을 쳤다. 울돌목은 서해 바다와 남해 바다가 만나는 곳으로 물살이 너무 세서 울면서 돌아가는 길목이라는 의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물살이 센 곳으로, 이곳으로 일본군을 유인하기 위해 벽파진에 진을 치면서 기다렸다. 이순신은 자신을 미끼로 내던진 것이고, 죽음에 대한 공포감 따위는 없었다. 오로지 적의 수군이 서해 바다를 돌아 여러 강을 타고 내륙으로 보급을 할 수 없도록 신명을 다할 뿐이었다. 조선 수군 전체적으로 사기가 떨어진 상태고, 이순신 또한 전투를 앞두고 심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더보기 어란진 해전과 벽파진해전 칠천량해전 이후 일본군에 그동안 꿈도 꿀 수 없었던 전라도 바닷길이 훤히 열렸다. 일본군은 한산도해전에서 패한 이후 몇 년간 견내량을 통과해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견내량 아래의 한산도는 이순신의 본진이 있는 곳이었기에 생각만으로 두려운 곳이었다. 하지만 칠천량해전 이후 견내량을 막아서는 조선군은 없었다. 그럼에도 바로 견내량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칠천량해전은 일본군 입장에서 계획에 없던 승리였기에 견내량 너머 조선의 바다 진격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나서야 일본의 대규모 함대가 견내량을 조심스레 넘어왔고, 한산도를 점령했다. 일본군은 몇 년간의 분풀이로 한산도를 갈기갈기 찢어놨다. 그 이후에는 전라좌수영의 본영인 여수가 유린되었다. 계속해서 조심스레 서진을 하며 고흥 반도까지 .. 더보기 수군 재건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의 패전 소식을 듣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몇 년에 걸쳐 만들어냈던 조선의 무적함대, 모든 전투 장비, 손발을 맞추던 정예병 수천 명이 칠천량 바다에 억울하게 수장되었다. 이순신은 직접 단성, 진주, 소량까지 돌아봤고, 세부 상황과 남은 병력들을 모았다. 진주에 머물던 중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되었다. 전과 같은 계급도 아닌 한 단계 낮은 계급으로 임명되었고, 현재로 따지면 해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지만 계급은 3성 장군 중장으로 임명한 것과 같았다. 이렇게 되면 품계가 다른 수사들과 같아지기에 의아한 조치였다고 누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아무런 불만을 표하지 않고 제수받았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고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 왕, 자.. 더보기 칠천량해전 선조와 원균은 왜 이토록 이순신을 싫어했던 것일까?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했고, 그 결과로 한반도를 지켜냈고, 이순신이 없었다면 나라를 완전히 빼앗겨 일본의 속국이 되었을 텐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고, 안타까울 뿐이다. 이순신의 파직 소식도 명나라와 일본에 속속들이 전달되었다. 선조는 원균에게 출정 명령을 내렸다.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그 많은 전투를 이순신과 함께 치르면서 어느 것조차 학습 못한 무능한 지휘관이었다. 많은 전투에도 이순신은 단 한 척의 판옥선을 잃지 않았는데, 거제도에 급습한 원균은 판옥선 1척을 소실시켰고, 아군 140여 명이 전사했다. 부산 공격을 명령한 선조는 권율 휘하의 육군 5000명을 원균의 수군에 합류시켰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있었던 몇 년 동안.. 더보기 휴전 회담 결렬 2차 진주성전투가 있고 난 후 4년째 휴전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은 계속되고 있었다. 조선에 한양을 내어준 일본군이 남해안으로 후퇴하면서 명과 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은 본격화되었다. 각 나라 대표가 회담을 진행했는데, 명나라 황제는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고 싶었고, 도요토미 또한 조선 침략의 정당화와 볼모로 왕자들 잡아 놓기, 명나라의 공주와 혼담 등 명나라 입장에서는 어느 하나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사항을 내밀었다. 명나라 회담 대표자는 거짓으로 일본의 거짓 항복 문서를 만들어 황제에게 바쳤다. 이렇게 회담으로 시간을 질질 끄는 기간이 4년의 휴전 아닌 휴전이 유지된 것이다. 시간이 지나 명나라 황제는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도요토미 또한 .. 더보기 억장이 무너진 이순신 순왜자는 조선인으로서 왜에 항복하고 왜군 편을 들었던 이들을 말한다. 반면 항왜자는 일본군임에도 조선에 항복한 후 조선 편을 들면서 일본에 저항하는 이들을 가리켰다. 항왜자들 중에 '요시라'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조선에게 유리한 정보를 흘려 자기를 믿게 만들었던 이중간첩이었다. 일본군 1 선발이었고 한양과 평양을 점령했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 전쟁이 속히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반면 2 선발이었고 함경도 쪽으로 진출했던 가토 기요마사는 계속해서 조선 정벌을 주장했다. 둘은 물과 불의 관계처럼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사이였다. 가토를 잡으라는 선조의 얼토당토 하지 않은 명령을 듣기 위해 부산으로 출정했고, 대마도와 부산 사이에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적을 잡으라는 것은 함정임에 틀림없었다... 더보기 왜군보다 더 무서운 적 2차 당항포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다시 견내량을 내려와서 한산도로 돌아왔다. 한산도로 돌아온 이순신 앞에 지금까지 상대해 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적이 나타났다. 왜선 수백 척을 격파했고 최소 만 명 이상의 왜군을 물귀신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조선군의 사망자는 39명에 불과했고, 부상자도 160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 휴전기간이 되어 일본 수군을 공격하지 못했지만, 조선 수군만 봐도 도망가기 급급했던 일본 함대는 왜성 앞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순신을 웅크리게 만들었던 더 큰 무언가가 있었고, 그것은 바로 전염병이다.수군은 전염병에 가장 취약했다. 육군과 달리 좁은 함선에 갇혀 생활하다 보니 집단 감염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전라좌수영 소속 수군의 10분의 1인 600여 명이 사망했다. .. 더보기 2차 당항포해전 휴전 중인 채로 시간은 흘러 1594년 새해가 밝았다. 남해안의 적을 공격하라는 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남해안에 4만 병력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해안에 축조된 왜성에 숨어 있었다. 출정 중 이순신 함대의 이동 경로도 노출될 수도 있고, 해안가 육지에 배를 정박하고 숙영을 할 때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대비해야 했다. 그럼에도 한산도에서 출격을 했다. 당시 삼도 수군의 함대 규모는 판옥선만 124척이었고, 협선과 포작선까지 더하면 수백 척이 넘었으니 엄청난 규모였다. 이순신 함대가 일본 영역으로 들어가자 소문이 발 빠르게 퍼졌고, 일본의 함선들은 여기저기 숨어들기 바빴다. 조선의 작은 포작선들이 바다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탐색을 했고, 조선 .. 더보기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