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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회담 결렬 2차 진주성전투가 있고 난 후 4년째 휴전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은 계속되고 있었다. 조선에 한양을 내어준 일본군이 남해안으로 후퇴하면서 명과 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은 본격화되었다. 각 나라 대표가 회담을 진행했는데, 명나라 황제는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고 싶었고, 도요토미 또한 조선 침략의 정당화와 볼모로 왕자들 잡아 놓기, 명나라의 공주와 혼담 등 명나라 입장에서는 어느 하나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사항을 내밀었다. 명나라 회담 대표자는 거짓으로 일본의 거짓 항복 문서를 만들어 황제에게 바쳤다. 이렇게 회담으로 시간을 질질 끄는 기간이 4년의 휴전 아닌 휴전이 유지된 것이다. 시간이 지나 명나라 황제는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도요토미 또한 .. 더보기
억장이 무너진 이순신 순왜자는 조선인으로서 왜에 항복하고 왜군 편을 들었던 이들을 말한다. 반면 항왜자는 일본군임에도 조선에 항복한 후 조선 편을 들면서 일본에 저항하는 이들을 가리켰다. 항왜자들 중에 '요시라'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조선에게 유리한 정보를 흘려 자기를 믿게 만들었던 이중간첩이었다. 일본군 1 선발이었고 한양과 평양을 점령했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 전쟁이 속히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반면 2 선발이었고 함경도 쪽으로 진출했던 가토 기요마사는 계속해서 조선 정벌을 주장했다. 둘은 물과 불의 관계처럼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사이였다. 가토를 잡으라는 선조의 얼토당토 하지 않은 명령을 듣기 위해 부산으로 출정했고, 대마도와 부산 사이에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적을 잡으라는 것은 함정임에 틀림없었다... 더보기
왜군보다 더 무서운 적 2차 당항포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다시 견내량을 내려와서 한산도로 돌아왔다. 한산도로 돌아온 이순신 앞에 지금까지 상대해 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적이 나타났다. 왜선 수백 척을 격파했고 최소 만 명 이상의 왜군을 물귀신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조선군의 사망자는 39명에 불과했고, 부상자도 160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 휴전기간이 되어 일본 수군을 공격하지 못했지만, 조선 수군만 봐도 도망가기 급급했던 일본 함대는 왜성 앞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순신을 웅크리게 만들었던 더 큰 무언가가 있었고, 그것은 바로 전염병이다.수군은 전염병에 가장 취약했다. 육군과 달리 좁은 함선에 갇혀 생활하다 보니 집단 감염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전라좌수영 소속 수군의 10분의 1인 600여 명이 사망했다. .. 더보기
2차 당항포해전 휴전 중인 채로 시간은 흘러 1594년 새해가 밝았다. 남해안의 적을 공격하라는 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남해안에 4만 병력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해안에 축조된 왜성에 숨어 있었다. 출정 중 이순신 함대의 이동 경로도 노출될 수도 있고, 해안가 육지에 배를 정박하고 숙영을 할 때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대비해야 했다. 그럼에도 한산도에서 출격을 했다. 당시 삼도 수군의 함대 규모는 판옥선만 124척이었고, 협선과 포작선까지 더하면 수백 척이 넘었으니 엄청난 규모였다. 이순신 함대가 일본 영역으로 들어가자 소문이 발 빠르게 퍼졌고, 일본의 함선들은 여기저기 숨어들기 바빴다. 조선의 작은 포작선들이 바다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탐색을 했고, 조선 .. 더보기
전라좌수사에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1593년 7월,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겼다. 일본군들은 한산도해전에서 패한 후 거제도롤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순신 입장에서는 한산도에서 견내량만 틀어쥐고 있으면 바다에서만큼은 일본군의 서진을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전진기지인 부산포를 다시 공격하기도 수월한 장소였기에 한산도는 천혜의 요지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자리 잡자 일본군은 견내량과 거제도 안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못하였다. 나였다면 지금까지의 전쟁을 통해 피로하니 조금은 안도하며 휴식을 가질 법도 한데, 이순신은 달랐다. 한산도에서 무관 정사준과 함께 일본군의 주력 무기인 조총을 연구했다. 적군의 주력 무기가 지닌 장점을 파악하려 노력했고, 연구 끝에 조총에 뒤지지 않은 조선의 정철총통을 만들어냈다. 조정에.. 더보기
임진왜란의 휴전 명나라 입장에서는 조선을 돕기 위한 전쟁에 열심을 낼 필요가 없었다. 자국의 영토가 전쟁터로 되는 것을 막고자 병력을 파병한 이유도 있었다.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명나라 전사자가 1000명이 넘었다. 또, 벽제관전투에서는 당시 요동 제독이었던 이여송의 친위 기병 1500명이 몰살당하기도 했다.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해 자국 군대의 손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원정에 큰 어려움을 겪었던 명나라는 이 전쟁에 발을 빼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일본은 조선 침략을 결정하고 부산에 상륙하여 쉽게 한양을 점령하였다. 이후 고니시가 평양을 점령하고 가토가 함경도로 진격하던 때만 해도 만사가 형통한 듯 보였다. 그러나 이순신 때문에 수군의 서해 진출이 불가능해졌고, 보급 또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 더보기
웅포해전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1차 출정 옥포와 합포, 적진포에서 승리하였고, 2차 출정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에서 연전연승했다. 3차 출정의 한반도에서 승리하면서 남해의 재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안골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4차 출정에는 당시 적의 본진인 부산포까지 완전히 쓸어버렸다. 육지에서는 일본군이 압승했지만, 해전에서는 조선군이 압승을 하는 상황이었다. 부산포해전에서 대패한 이후 일본은 다시 한번 육지를 통해 호남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군은 호남으로 넘어갈 수 있는 관문이었던 진주성을 공격했으나, 성주 김시민과 진주성 주민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진주성은 지켜졌고, 일본군은 육지로의 호남 진출을 다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김시민은 전사하였지만 거의 위명은 일본에.. 더보기
부산포해전 부산 쪽에 첩보선을 보내 정탐하였는데, 일본 전함 470여 척이 부산 해안에 넓게 포진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자신들의 함대를 보호하기 위해, 부산포 해안 인근의 발석차는 물론 천자총통과 지자총통, 현자총통 같은 조선의 화포까지 무수히 배치하고 있었다. 실제로 부산포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본진, 나고야 사령부와 긴밀히 연락을 취하던 심장부였다. 일본군 입장에서 부산포가 무너진다면 육지의 일본군들이 본국인 일본으로 돌아갈 기착지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부산포를 반드시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대표할 만한 사령관들이 부산포에 다 모였고, 일본군에게 부산포를 공격당하는 것은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음을 의미했다. 거북선이 부산포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