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 중인 채로 시간은 흘러 1594년 새해가 밝았다. 남해안의 적을 공격하라는 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남해안에 4만 병력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해안에 축조된 왜성에 숨어 있었다. 출정 중 이순신 함대의 이동 경로도 노출될 수도 있고, 해안가 육지에 배를 정박하고 숙영을 할 때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대비해야 했다. 그럼에도 한산도에서 출격을 했다. 당시 삼도 수군의 함대 규모는 판옥선만 124척이었고, 협선과 포작선까지 더하면 수백 척이 넘었으니 엄청난 규모였다. 이순신 함대가 일본 영역으로 들어가자 소문이 발 빠르게 퍼졌고, 일본의 함선들은 여기저기 숨어들기 바빴다. 조선의 작은 포작선들이 바다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탐색을 했고, 조선 수군은 사냥감을 찾고 있었다. 목표는 당항포의 왜선 30척으로 결정되었다. 좁은 당항포구 안으로 124척의 판옥선이 모두 들어갈 수 없었기에 전라좌수영, 우수영, 경상우수영에서 각각 10척을 선발하여, 판옥선 최정예 별동대를 편성하였다. 당항포의 일본 수군들은 조선 수군을 발견하고 크게 동요하였다.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쳤다. 너무도 쉽게 일본 함대 30여 척을 불태우고 격침시켰다. 기세를 몰아 여기저기 숨어 있는 일본 함선을 찾아내기 위해 레이더망을 펼치고 있었다. 이때 명나라 쪽에서 패문을 보내왔고, 내용은 일본과 명나라는 서로 공격하지 않기로 협약을 맺었으니 공격을 멈추라는 것이었다. 이순신은 상당히 분노하면서도, 국력이 약한 나라의 장수인 것에 대한 서러움을 진하게 맛보았다. 2차 당항포해전에서 전함 31척을 격침시켰고, 약 4100명의 일본군을 격멸시켰다.
아픈 역사가 반복이 된 것일까. 임진왜란, 6.25 전쟁 등 수많은 외구들의 침략 속에서도 굳건히 나라를 지켜냈고, 우리의 문화와 경제를 꽃피워낸 조상님들이 대단하다고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국력이 약해 당한 측면은 아쉽고 가슴이 많이 아픈 것은 사실이다. 이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수준 높은 군사력과 국력을 높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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