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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상

사천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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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해전의 소식이 일본으로도 전해졌고, 그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불같이 화를 냈다. 당시의 일본은 바다의 나라로 불릴 정도로 아시아에서 강한 해군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다. 또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다. 하찮게 여겼던 조선 수군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 해군의 실체와 행각, 상황들을 빠짐없이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져 일본은 조선의 해군을 파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전라좌수영 함대가 그만큼 첩보전을 잘 수행했다는 의미였다. 다음은 분노에 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린 명령이다. 

1. 지체하지 말고 조선 왕을 사로잡을 것.

2. 속히 전라도를 속지로 삼아 원정군의 식량을 현지에서 조달할 것.

3. 남해안 일대를 거점화하고 성을 쌓을 것.

4. 남아 있는 조선 수군을 찾아내 철저히 섬멸할 것.

5. 서해안 돌파를 서두를 것.

 

다섯 가지의 명령을 보면 히데요시의 분노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1차 줄정 승리 이후 이순신은 더 큰 고민과 번뇌로 뜬눈으로 며칠 밤을 보냈다. 패배를 맛본 일본군이 악에 받쳐 공격의 수위를 높일게 분명했다. 10여 척의 왜선이 사천 쪽에 나타나 노량 해협까지 후퇴하였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순신은 출정을 고민하고 있었다. 만약 출정한 사이 왜군들이 돌아서 빈집이 된 여수로 침략한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출정을 결심한 이순신은 노익장 정걸에게 여수의 수비를 맡겼다. 몇 척의 판옥선을 여수에 남긴 채 5월 29일 2차 출정을 하였다. 사천 앞바다까지 진격했을 때 척후선을 통해 일본 전함 13척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일본군은 사천포를 거점으로 왜성을 만드는 중이었는데, 사천포는 진주성과 거리가 불과 15km 남짓이었고, 여수와도 가까워 이순신으로서는 절대 두 눈 뜨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순신은 적을 유인할 생각으로 도망가듯 돌아 나왔다. 그러자 왜선 12척이 조선의 함대를 쫓아오더니 이내 멈추었다. 일본군은 사전 조사를 통해 판옥선이 쉽사리 들어오기 어렵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옥포 등에서 패배했음을 알고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함포 사정거리를 계산하고 그 사정거리를 벗어난 암초가 많은 사천 해안에서 조선 수군과 대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밀물이 들어오자 조선 수군의 움직임이 보였다. 거북선이 처음 선보였는데, 2척의 거북선이 조총 사정거리 50m 안으로 파고들었다. 조총을 쐈지만, 무쇠 갑판에 측면은 목판이었지만 두께가 15cm가 넘었다. 괴기한 모습으로 용머리에서는 대포가 나오더니 불을 뿜었다. 근거리에서 함포에 맞은 왜선 하나가 순식간에 박살 났다. 거북선 몸체 공격에 왜선의 선체 일부가 여지없이 부서져나갔다. 거북선의 크고 강한 노와 부딪힌 일본 세키부네의 노들이 힘없이 부러졌다. 쉴 새 없이 전진했고, 포를 발사했다. 곡사포도 아닌 직사포가 발사되고 있었고, 이는 세계 해전사를 새롭게 쓰고 있는 순간이었다. 외관의 멋스러움에 비해 거북선의 실내는 아수라장이었을 것이다. 전투원들의 귀는 먹먹함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을 것이고, 바닷물은 계속 새어 들어왔을 것이다. 적선과 부딪치면서 온몸은 여기저기 찍혔을 것이고, 오직 조타수만이 방향을 잡고 돌격대장의 신호에 운명을 맡긴 채 자신의 일을 수행해야만 했던 선원들이 정말 존경스럽고, 얼마나 처절했고, 치열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13척의 일본 전함 중 12척이 불타거나 격침되었다. 1척이 남았음에도 이순신은 후퇴 명령을 내렸고, 이 또한 나름의 계산이었다. 일본군 패잔병이 그 배를 타고 부산이나 일본으로 도망칠 궁리를 할 것이고, 그때 그 배를 잡으면 되는 것이었다. 새벽부터 대기하고 있던 조선 수군에게 살아 돌아갈 수 있겠다는 기대감으로 사천을 빠져나오던 일본군들은 좌절감을 느끼며, 바다에 빠졌다. 헤엄치다 등에 화살이 꽂혀 가라앉거나, 꼬챙이에 걸려 조선군의 배에 끌어 올라가 목이 베이기도 하였다. 

 

사천해전은 이순신과 전라좌수영의 2차 출정 후 첫 승리이기도 했지만, 거북선이 처음 투입된 전투였기에 아주 중요한 전투였다. 거북선의 위력 또한 확인된 전투이기도 했다. 위풍당당한 완벽한 승리를 거둔 후 사량도라는 섬에서 며칠 휴식을 취했다. 육지에서는 패배했다는 소식을 많이 들어 사량도  사람들은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자신을 지켜주어야 할 경상우수영의 수군들은 보이지도 않았지만, 조선 함대 수십 척을 보고는 너무나도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아끼지 않고 음식과 술을 내오며 전라좌수영 수군들을 대접했다. 허나 이순신의 어깨 부상과 몇몇의 부상자로 인해 밥을 먹고 마시면서도 표정은 어두웠다. 몸에 총탄이 박힌 이순신은 어깨 살을 도려내었다. 그 와중에도 태연함을 잃지 않았고, 어깨 수술 후 사량도를 순시하며, 휴식 중인 장병들을 격려했다. 전장의 영웅이 되어가는 이순신이 어깨를 두들겨주었을 때 장병들은 격한 감격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입은 부상은 이순신을 1년 이상 괴롭혔다. 부상의 정도가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휴식 중인 장병들을 격려하며 사기 진작을 위해 아픈 티도 내지 않았을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면, 눈물이 고인다. 이렇게 이순신 장군의 활약과 조선의 수군들의 노고와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그 마음들이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어서 몹시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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