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포해전에서 거둔 승리는 임진왜란 발발 이후 첫 승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승리에 들뜬 병사들의 마음을 가라앉힌 후 휴식을 위해 함대를 거제도 영등포 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런데 바다에서 신기전이 쏘아 올려졌다. 척후병으로부터 올라온 일본 전함이 있다는 신호였다. 옥포에서 싸운 후 약간은 지쳐있었던 조선군이지만, 눈앞의 적을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확인된 것은 합포 근방에서 일본 함선 5척이 우왕좌왕하는 중이었다. 조선 함대에 막혀 도망갈 수 없었던 일본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치려던 찰나였다. 옥포에서와 같은 진을 치게 한 뒤 판옥선에서 포를 내뿜었다. 일본군이 버리고 간 전함 5척을 모두 불태웠고, 전라좌수영은 출정 후 두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이순신은 합포에서 나와 남포로 향했다. 조선의 함대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전략적으로 안전한 해안에 배를 대고 배 안에서 잠을 청했다. 그리고 새벽 일찍 날이 밝기 전에 움직였기 때문에 일본군은 조선 함대의 위치를 잡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남포항을 떠난 조선 함대가 적진포에서 다시 한번 일본 함선 13척을 만났다. 포구에 배를 묶어둔 채 마을에 올라가 약탈을 하고 있었고, 전열이 정비되기 어려웠던 일본군은 조선 함대를 보고는 배를 버려둔 채 산으로 도망쳤다. 버려둔 전함 11척을 쉽게 불태울 수 있었고, 옥포와 합포, 적진포에서 모두 40척이 넘는 일본의 전함들을 불태우거나 침몰시켰다. 이 과정에서 전라좌수영 수군들은 큰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이어지는 전투들에 매우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임진왜란 초창기 해전마다 승전을 거둔 이유는 따로 있다. 이순신의 전략과 전술, 그리고 잘 훈련된 수군들과 격군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함포능력이 전투 상성에서 큰 우위를 점했다. 또, 일본의 안택선과 조선의 판옥선의 차이 또한 큰 요소로 작용했다. 판옥선은 소나무로 만들어져 튼튼했고, 제자리 선회가 가능했다. 반면에 속도가 느리고, 무겁기 때문에 격군들이 고생스러웠던 함선이다. 속도전은 무리였지만, 튼튼했기 때문에 조석 간만의 차가 크고 파도가 센 조선의 바다에 적합했다. 이러한 우수한 내구성 덕택에 갑판 위에 무거운 포대들을 배치하고 장거리 함포들을 발포해도 큰 무리가 없었다. 제자리 선회가 가능했기에 포신이 뜨거워지면 방향을 바꾸며 포를 마음껏 쏠 수 있었던 것이다. 안택선과 세키부네는 모두 삼나무로 만들어져 함선이 가벼웠고, 바닥이 첨저선으로 뾰족했기에 속도가 빨랐다. 가볍고 빨랐기에 장거리 항해가 가능하였고, 먼 거리도 거리낌 없이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전술은 백병전으로 상대의 함선에 올라타 등선육박전술을 기본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함포의 역할은 크지 않았다. 가벼운 삼나무로 만든 함선들은 함포의 진동을 이겨내지 못해 포를 쏘려면 어려 명이 잡고 쏘아야 했다. 포도 포르투갈로부터 수입한 것이었기에, 사정거리도 짧았고, 정확도도 떨어지고, 시간당 쏠 수 있는 포탄의 수 역시 조선에게 압도적으로 밀렸다. 함포 사정거리의 격차를 경험한 일본군은 당연히 접근전을 전개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움직일 때마다 탐망선들이 일본 함대의 움직임을 꿰뚫고 있어서, 전투 양상을 백병전으로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순신은 지피지기했던 것이다. 병력과 전함의 수가 일본에 비해 절대 열세였음을 미리 계산했고, 모든 전투마다 조선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승리를 해냈다.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낸 데에는 이순신의 역할이 압도적으로 컸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판옥선을 자유자재로 움직여줄 격군, 정확한 함포를 쏘기 위해 손발을 맞춘 포수들, 활로 명중시킬 수 있는 우수한 사수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꾸준한 훈련과 포탄 제작, 화약의 제작 등 이 모든 것들이 전라좌수사가 되고 1년 동안 묵묵히 준비했기에 가능한 결과물이었다. 승리 후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의 기분이 과연 어땠을까?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가족들에 눈에는 눈물이 흘렀고, 모두 축제의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순신은 다른 의미로 눈물을 흘렸다. 상주에서 이일이 패했고, 탄금대에서 신립이 패하면서 한양을 적에게 빼앗겼고, 임금이 파천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였기 때문이다. 엄충한 전시 상황이었고,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달린 와중이었다. 이순신은 편히 잠을 청할 수 없었고, 고뇌의 시간들 속에서 전라좌수영의 수군이 더욱 강해져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곧바로 해상 훈련을 전개했고, 누구도 불만을 표하거나 힘들다고 투덜대지 않았다. 강한 훈련만이 자신들의 살길임을 스스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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