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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상

이순신의 출생부터 관직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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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출생에서 무과에 합격까지]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초계 변씨와 결혼했는데, 변 씨는 지방 현감의 딸이었다. 이순신의 외할아버지가 지방의 사또였음을 짐작해 봤을 때, 

이순신은 금수저까지는 아니더라도 웬만한 양반 집안 만큼의 집안임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은 1545년 3월 8일, 지금의 서울 중구 인현동 부근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당시 건천동은 군사훈련장인 훈련원 부근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전쟁놀이를 즐겨했고, 항상 대장 역할을 맡았다. 동네 출신인 사람 중에 류성룡과 원균이 있었는데, 류성룡은 이순신보다 3살 위였고, 원균은 5살 위였다. 류성룡은 진작에 이순신의 사람됨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후에 원균과 이순신의 아이러니한 인연이 어린 시절 한 동네에서 자랐다는 것으로 조금은 신기하게 생각이 된다. 

이순신은 청소년기에 외가가 있었던 충남 아산으로 이사하였다. 이순신은 21세에 같은 아산에 살고 있었던 보성 군수를 지낸 방진의 딸과 결혼하였다. 두살 어린 부인을 얻게 된 이순신은 무남독녀였던 부인 덕에 재산을 모두 물려받을 수 있어서 나름 장가를 잘 간 셈이 되었다. 

형을 따라 문과를 준비하던 이순신은 결혼 1년 후인 22세부터 무과를 준비했다. 무관 출신이던 장인이 이순신의 무예를 연마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28세에 처음으로 무과에 도전하였으나, 말이 넘어져 부상을 얻게 되었다. 결과는 낙방. 낙방의 아픔을 딛고 이순신은 다시 무과에 준비하였고, 4년 후에 치러진 무과에 당당히 합격하였다. 무과 급제자들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프로 무사들이다. 이순신 역시 젊은 시절 대단한 괴력의 소유자였다. 특히 활 쏘기에 뛰어났다. 기록들을 봐도 이순신보다 활을 잘 쏘는 이는 없었다. 

 

[관직생활]

임진왜란을 16년 앞둔 시점에 무관으로서 공식적인 경력이 시작되었다. 32세에 발령받은 첫 임지는 함경도 동구비보였고, 직책은 말단 관리격이었다. 함경도 권관 생활 3년 후 자신의 출생지인 건천동으로 발령을 받았다. 무관 인사권을 가진 병조정랑인 서익이 이순신에게 인사 압박을 넣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거부했고,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 일리 관료들 사이에 소문이 났고, 병조판서 김귀영이 자신의 서녀를 이순신의 둘째 부인으로 주겠다고 했지만, 이 또한 거절하였다. 

이순신은 35세의 나이에 충청 병사 군관으로 발령받았다. 언제 어느 자리건 이순신은 항상 청렴하고 결백했다. 이순신의 방에는 베개와 이불 옷가지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순신은 35세 나이에 충청 병사 군관으로 발령 받았다. 이순신은 관직에 들어선 지 4년째가 되던 36세에 전라도 고흥 발포 만호직으로 발령받았다. 만호직은 오늘날 군 계급으로 대령에 해당하는 계급이었다. 훗날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었을 때 산하의 5관 5포를 거느리게 되는데, 이때의 고흥 발포 만호 생활 덕분에 여러 가지 돌아가는 상황들을 용이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순신에게 처음에는 호의적이지 않았던 상관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순신의 성품과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함경도에서 여진족을 막는 역할도 했었고, 녹둔도를 지켜냈지만, 패배한 책임을 이순신에게 물었다. 실질적으로 병력이 부족해 밀렸지만, 여진족에게 끌려갔던 백성들도 구했고, 엄밀히 따지면 패배는 아니었다. 이로 인해 첫 백의종군을 당하며, 여진족 공격에 참여했고,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다. 

 

[전라좌수영 이순신]

각 관할지를 비교하면 전라우수영, 전라좌수영, 경상우수영, 경상좌수영 이렇게 4곳의 수영 중에서 관할지가 가장 적고 병력과 물자를 확보하기가 가장 어려운 곳이 전라좌수영이었다. 하지만 준비상태는 어느 곳보다 출중했고, 이로 인해 이순신은 우리들의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준비가 잘 되어있는 곳은 칭찬했고, 미비한 곳은 꾸중하고 훈계하였다. 이순신은 일본의 침략을 예상하였고, 준비 상황을 꼼꼼하게 해왔다. 이순신은 스스로 군사권을 책임지는 최고 지방관이자 사령관으로 행정력에 최선을 다했다. 병력 충원 상태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검열했다. 그리고, 바다에서 싸워야 하니 전투선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어야 했다. 또, 원거리 공격력을 강화하기 위해 함포를 장착했다. 판옥선의 약점과 조선 수군의 낮은 전투 경험을 보완하기 위해 고민했고, 일본군이 판옥선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지붕을 씌우고, 칼과 송곳을 꽂아 일본군의 등선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전투선을 건조하겠다는 창의적인 생각과 실천은 정말 멋진 도전 정신이었다. 누가 창안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여러 훈련을 거쳐 실전에 투입시켰던 주인공은 바로 이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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